[스크랩] 제~발! 부르짖지 마십시오
(네이버 나단님의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우주현 목사님의 글입니다)
제~발 부르짖지 마십시오.
제발! 주여~ 주여~ 주여~ 만세삼창하듯 부르짖지 마십시요
이는 무당들이 귀신부를 때 하는 짓(?)들과 같습니다.
제발! 교회안에서 기도할 때 큰소리로 부르짖어 다른 성도의 기도에
방해되지 않도록 배려하십시요
정말로 부르짖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개인기도방으로 옮겨 부르짖으십시요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예수님도 그렇게 부르짖으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귀 먹지 않으신 하나님
한때 한국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교회성장신학'의 본산으로 유명한 미국의 풀러신학교가 있습니다.
그 학교의 피터 와그너 교수는 바로 그 '교회성장신학'을 발전시키고 보급한 분으로 아주 유명한 교수인데,
그는 특히 한국교회의 성장을 주목하고 자신의 교회성장학의 한 모델로 한국교회를 지목했습니다.
물론 한국에도 여러번 다녀갔었으며 풀러신학교는 아마 가장 많은 한국학생이 유학하고 있는 학교일 겁니다.
그런데 그 분의 과목중에 교회성장과 기도에 대한 과목이 있는데, 그 과목의 수업시간에 피터와그너 교수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Korean Prayer'라는 이름으로 한국 특유의 기도를 소개하고, 또 학생들에게 실습도 시켰답니다.
피터 와그너 교수가 교회성장을 위한 특별한 기도로 소개하고 보급하려 했던 'Korean Prayer', 도대체 그게 뭘까요?
'Korean Prayer'로 소개된 그 기도는 '주여!'를 세 번 크게 부르고 이어서 큰 소리로 통성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재밌는 것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실습을 시키면서, 한국말 그대로 '주여!'를 세 번 부르게 했다는 것이지요.
미국 학생들이 'O, Load!'가 아니라 한국말로 '주여'를 세 번 큰 소리로 부르는 것, 상상해 보십시오. 재밌지 않습니까?
태권도의 용어에 이어 한국말 그대로 수출되고 있는 몇 안되는 우리의 문화수출상품으로 'Korean Prayer'가 당당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큰 관심을 두었던 피터와그너 교수의 눈에는 그 'Korean Prayer'가 아주 신기하기도 했으며
또 한국교회의 성장에 크게 기여한 중요한 부분이며, 또 아주 특별한 기도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들리는 소식은, 그 피터와그너 교수도 이제 한국교회의 성장은 끝났다고 진단하고, 한국모델을 포기하는 대신 요즘엔 자신의 새로운 모델을 남미의 교회들에서 찾고 있다고 합니다.
'Korean Prayer'도 이젠 약발(?)이 떨어졌다고 판단한 것 같은데...유명한 학자라서 그런지 역시 판단도 빠릅니다.
외국 기독교인의 눈에 그 기도는 참으로 신기하고 또 특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공식적이며 공개적으로, 열정적이며 시끄럽게 기도하는 경우는 아마 교회 역사에서도 두 번은 없었을 겁니다.
주여! 삼창하고 이어서 큰 소리로 통성기도 하는 것. 구태여 기도원이 아니라도 일반적인 학국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평범한 기도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개교회에서의 일반적인 기도 시간에 - 특히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대 - 유독 큰 소리로 기도하는 분들이 꼭 있어서 가끔씩은 감정적인 마찰을 빚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경에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했는데 왜? 라고 말하면 또 달리 할말도 없어서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과연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예레미야 29장 12절도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르짖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대표적인 이 두 구절의 말씀을 표준 새번역에서는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 볼까요?
'네가 나를 부르면, 내가 너에게 응답하겠고, 네가 모르는 크고 놀라운 비밀을 너에게 알려 주겠다'(표준 새번역, 렘 33:3)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표준 새번역, 렘 29:12)
개역 성경에서 '부르짖으라'고 번역된 부분이 모두 '부르라'로 번역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아도 'Call to me and I will answer...', ;You will call upon me and come and pray...'
모두 'call'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부르짖으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카라’인데 이는 영어의 call로서 부르고 찾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부르다(call)’와 ‘부르짖다(cry out, shout)'는 사실 완전히 다른 말이며, ’브르짖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자앜‘리아는 단어가 따로 있어서, 짐승이 부르짖을 때나 사람이 슬퍼 통곡할 때 ’자앜‘이라는 동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카라’는 단순히 이름을 부르라는 뜻이지 부르짖으라는 의미는 분명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인격적 신뢰와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결국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 즉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이 두 말씀은 우리에게 다시 보여주며 가르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씀은 한국교회가 적용하듯 열심히 크게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출발은 믿음의 고백, 즉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의 이름을, 그의 존재를, 그의 인격을 부르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첫 마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는 것, 이것이 바로 ‘카라’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올바른 지식은 없이 열심만 특심한 것이 사실 문제입니다.
누구보다 성경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며 성경대로를 주장하지만 사실은 성경대로가 아니라 성경대로라 착각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전통을 믿는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다고는 못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오류였음을 우리는 다시 환기하며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목소리 큰 사람들이 이기는 게임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가진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그러면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까?
물론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간절함 때문에 부르짖을 수 밖에 없을 때가 물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고 해서 더 간절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게 더 간절하다면 주님께서 ‘네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도하라(마 6:6)’고 가르치신 것이 틀린 것이 됩니다.
그리고 여럿이 함께 기도드리는 경우에는 더욱 더 자신의 큰 소리로 인하여 타인들이 방해받지 않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제 경험과 관찰로는 큰 소리로 열심히 기도하시는 분들이 대체로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기적인 본성이 기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제가 판단한다면 지나친 편견일까요?
아무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자신보다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성경속의 인물 중 간절히 기도한 사람의 경우로 어떤 분들이 주로 떠오르십니까?
저는 먼저 한나가 떠오릅니다. 사무엘서 1장에는 한나의 기도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1장 10절에 보면,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3절을 보시면 한나가 어떻게 통곡(?)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통곡은 속으로만 말하여서 입술만 동하였고 소리는 들리지 않는 이상한 통곡(?)이었습니다.
이런걸 우리는 통곡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통곡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부르짖다’, ‘통곡하다’ 이런 단어들은 우리의 종교문화에서 비롯된 기도가 번역자의 선입견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녀는 자신의 표현 그대로 ‘마음이 슬픈 여자(15절)’였습니다.
그러나 그 슬픔을 안고 기도할 때에 그녀는 통곡하거나 큰 소리로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철저하게 절제하면서 오히려 피 눈물을 삼키면서 기도했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슬펐던 여자, 한나의 기도는 한바탕 울음과 곡성으로 한을 푸는 기도가 분명 아니었습니다.
이어서 제게 떠오르는 인물은 당연히 엘리야입니다.
그의 상황도 처절했음이 분명했는데...그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열왕기상 18장이 그 유명한 갈멜산의 결투 장면인데, 특히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와 엘리야의 기도를 비교해 보십시오. 28절을 보시면 열받고 흥분한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참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는 ‘큰 소리로 부르짖고...’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그러나 역시 표준 새번역은 ‘더 큰 소리로 부르짖으면서...’라고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제가 표준 새번역을 좋아하는 이유, 더욱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 모습이 바로 히브리어로 ‘자앜’하는 -부르짖는, 울부짖는- 모습입니다.
반면 엘리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36절)”,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기도의 사람 엘리야의 기도 역시 기도는 열심의 문제가 아니라 바른 관계의 문제임을 다시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관계의 확인이며 믿음의 확인이지 나의 열심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며, 내 감정을 쏟아놓는 시간도 아닙니다.
사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자세는 꼭꼭 숨어서 은밀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먼저 지적하신 것은 알다시피 기도하는 자세였습니다.
기도를 가르치신 마태복음 6장 6절에 의하면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세히 보면, 기도의 가르침인 6장 5~15절의 그 문단 속에서 오직 6절 말씀만 ‘너(you)'가 단수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즉, 너의 기도는 너 혼자서 너의 골방에서 문까지 걸어 잠그고 오직 너의 아버지께만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켜서 자신의 골방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부르며 은밀하게 기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개인 기도 시간과 공간을 갖기가 우리의 주거문화와 생활여건상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함께 하는 기도라도 그 기도가 궁극적으로는 각 개인들의 골방기도가 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이같은 골방의 기도에 실패하면 자연히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큰 소리로 사람에게 보이려고(마 6:5)’ 기도하게 되고, 그래서 결국 중언부언하게 되고, 큰 소리로 말만 많이 하는 기도가 됩니다(마 6:7).
그리고 그런 기도는 성경에서 이방인의 기도라고 하지 하나님 자녀들의 기도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혼자만의 골방에서 기도를 한다면, 때로 감정이 격해져서 부르짖는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삼상 15:11 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신다고 말씀하시자 그 밤에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분명히 ‘자앜’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온 밤을 사울을 위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때로는 부르짖어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을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혼자 드리는 기도였으며 그가 흘린 눈물은 타인과 민족을 향한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조금은 문제가 되고 있는 공적 기도시간에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과는 사실 차원을 달리하는 기도이지요.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롬 14:16)’하는 것이 성숙한 성도의 지혜입니다.
열심히 기도한다는 그 선한 일이 왜 비방과 시비가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기도에서도 먼저 타인을 배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했던 대부분의 기도들이 사실은 ‘개인의 정욕에서 비롯된 기도(약 4:3)’였음도 인정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의 감정을 시원케하는 -심하게 말하면 스트레스를 푸는- 기도일때가 많았음도....
어제 성경을 읽다보니 전도서 말씀(전 5:2)에 이런 말씀이 있더군요.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니라.’
말을 적게 그리고 작은 소리로 하는 기도를 추구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기독교의 오랜 전통 가운데 있었던, ‘고요함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하나님의 음성ㅇ르 들으며 묵상하는 기도’이지요.
현대 개신교회에서는, 특히 한국교회에서는 거의 모르고 있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추구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우리 아버지는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눈 멀기는 하셨지만 귀 먹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의 신음조차 들으실 만큼 그 귀를 우리에게로 향하여 세우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부르면 내가 너에게 응답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부끄러운 아들은 오늘도 가장 작고 낮은 목소리로 아버지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봅니다.
귀 밝으신 나의 아버지..........
글 / 우주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