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글)
손 흔들며 찬양하기 전에 생각해 봅시다!
미국뿐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에 있는 기독교 교회내의 공통적인 고민이 있는데 그것은 매년마다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에 있는 많은 기독교회들에서 청년들이 신앙에 흥미를 잃고 교회를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지도자들과 목사들은 축제식 예배 형식을 교회 안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축제식 예배 형식은 원래 천주교회에서 시작하였는데, 오순절파(순복음) 교회들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고, 지금은 거의 모든 기독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예배 형식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떠나간 교인들에게 영적인 각성을 불러일으키고 다시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만드는 신앙부흥을 일으키려는 노력 대신에, 교인들이 떠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흥미 위주로, 또한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축제식 예배 형식을 교회에 받아들였다.
교회 안의 두 부류
축제식 예배 형식에 대해서 좀더 깊이 있게 언급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성경에 나오는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음에 나오는 질문은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질문이다. “복음을 전파해야 할까? 아니면 교회를 성장시켜야 할까?” 우리는 신실한 교인으로써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현재, 교회 안에는 이 질문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이 존재한다.
한 부류는 복음과 진리에 초점을 맞춰서 그것을 보존하고 전파하는 면에 최선을 다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이성과 양심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를 올바로 세우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교육시키는 일에 강조점을 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한 부류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끌어 모아서 교회를 빨리 성장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서 일하고 있다.
교회의 성장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교회를 성장시키는 방법론에 대하여 골몰하게 되는데,
그들은 교인 수가 성장하기를 간절히 원한 나머지 진리와 원칙에는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교인 수를 늘일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그 결과 그들은 교회에 축제 예배 형식을 도입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눈을 감고 손을 흔들며 복음 성가를 부름으로써, 감정적으로 흥분된 상태 하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고 그것을 통하여 감정적 만족과 행복감을 느끼게 하려는 시도가 바로 축제식 예배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 방식은 사람들의 이성과 양심에 호소하는 성령의 음성을 소홀히 여기게 이끌어 간다. 왜냐하면 일단 감정적
예배 방식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러한 교회들은 더 이상 교인들의 죄의 문제와 회개에 대한 촉구를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인들의 감정적 만족과 행복감을 깨뜨리는 어떤 것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통하여 역사하지만, 사단은 인간의 감정을 통하여 접근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개, 감정적 예배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진리인가?”, 또는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감정적 만족과 행복감을 맛볼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지금은 축제의 기분에 들뜰 때가 아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전에서 손을 들고 몸을 흔들면서 복음 성가를 부를 때가 아니다.
지금은 드럼과 현란한 조명으로 교인들의 마음을 무디게 해서는 안 될 때이다.
지금은 예수께서 다시 재림하실 날이 점점 가까워지는 때로서, 재림을 위해 준비하며 자신의 죄와 마음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살아야 할 때이다. 거룩한 천사들마저 하나님 앞에서는 날개로 얼굴과 몸을 가리며 깊은 경외심을 나타내는데,
어찌 우리 같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전에서 경박한 음악과 몸짓과 손동작을 할 수 있을까? 축제식 예배를 받아들이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해 보고 경건하고 진정한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오순절파식 예배와 방언
오순절 주의(Pentecostalism)의 흔들어 대는 손과 몸, 극히 감정적인 설교들, 크고 쿵작거리는 음악, 실신하여 쓰러짐, 방언을 말함, 기적적인 치료들을 우리들은 주위에서 많이 보아 왔다.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일까? 방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본(A. D. Bohn) 목사님은 자신이 시카고에서 어떤 날 저녁 한 오순절 교회의 장막 집회에 참석해서 한 부인이 중국어로 방언을 하는 것을 들었고, 자신이 아는 한 중국인 세탁업자가 청중 가운데 있는 것을 보았다.
후에 본 목사님이 자신의 세탁물을 찾으러 그 중국인 세탁업자가 하는 세탁소에 가서 말했다. “당신이 전에 그 장막 집회에서 중국 방언을 들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하고 묻자, 그 중국인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고 얼굴을 찡그리며, “재미없어요.”라고 했다. “왜요? 그 부인이 당신네 나라말로 방언한다고 하던데요.” 그 중국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중국말로 하는 것은 맞았는데, 얼마나 욕지거리를 하는지.”
하와이 섬 북부 연안에 살고 있던 한 젊은 포르투갈 여인이 자기네 교회에서 드리는 의식들에 싫증이 나서 오순절 교회 집회에 참석했다가 그 교회 교인이 되고 말았다. 나중에 그녀는 방언까지 말하게 되었다.
열렬한 선교정신으로 그녀는 한 필리핀 사람들의 야영회에 참석하여 포르투갈 말이 섞인 엉터리 영어로 필리핀 사람들에게 증거하려 했으나 언어 소통이 어려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좌절한 그녀는 잠시 멈춰서 방언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했고, 기적적으로 그녀는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에 당황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얼굴을 찡그리든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든지, 그녀를 흘겨보든지 하였다. 놀란 그녀는 방언을 멈추고 엉터리 영어로 물었다. “무엇이 잘못됐습니까? 왜 여러분들은 나 말 하는 것 싫어합니까? 나, 일로카노(Ilocano) 말 하는 겁니다. 아닙니까?”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한 사람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일로카노 말은 잘 하는데, 당신이 하는 말은 순전히 입에 담지 못할 소리들이란 말이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이 일로카노 말로 음담패설을 토해냈다는 설명을 듣게 되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성경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결국은 방언에 대한 성경의 올바른 해석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성경을 함께 공부한 목사님에게 그녀가 방언을 말한 후 그녀는 자신이 정신을 잃었었던 것을 종종 두려워했다고 덧붙였다.
사단은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남은 무리가 준비되고 늦은 비 성령의 운동(요한계시록 18장에 나타난 예언)과 큰 부흥이 가까이 이른 것을 알고, 미리 오순절 식의 굉장한 거짓 부흥을 일으킬 것이다.
거짓 부흥과 참 부흥이 우리가 곧 통과해야만 할 두 가지 경험이기 때문에 우리가 첫 번째 것인 거짓 부흥과 그 다음 것인
참 부흥을 구분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공부하는 것이 참으로 필요하다. 거짓 부흥과 진짜 부흥에 대해 연구해 보자.
진짜 부흥
모든 진짜 부흥들에서 남녀들은 죄를 깊이 자각하고 구세주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낌으로 자백과 회개로 용서를 발견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 그들은 믿고 침례를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 생애를 하기 위하여 일어난다. 그들은 전에 행하던 그들의 정욕을 따라 자기 자신들을 꼴 짓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주님의 품성을 반사하며, 그분의 깨끗하심과 같이 그들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
그리하여 전에 미워하던 것을 이제는 사랑하고, 전에 사랑하던 것을 이제는 미워하게 된다.
교만하고 자기주장만 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며, 허영적이고 교만한 사람들이 착실하고 조심성 있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의 결과이다. 개혁이 없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거짓 부흥
1. 상상력에 호소
2. 감정을 자극
3. “무언가 새롭고 깜짝 놀랄만한 것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킴
4. 성경 진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음
5. 어떤 감정을 일으키는 색채를 원함
6. 조용한 이성에 호소하는 기별 같은 것엔 아무 반응이 없음
7. 진짜를 거짓과 혼합함 - 많은 사람들이 그 실상은 전연 다른 신의 공작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고 기뻐함
8.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릇된 태도
9. 마음과 생애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음
10. 그리스도로 더불어 연합함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참가하게 됨
거짓부흥의 특징
1. 큰 소리로 외치는 것, 드럼과 요란한 음악과 춤이 따름
2. 악기들의 남용과 오용
3. 혼잡한 소리와 광적인 태도
4. 이지적인 인간의 감각들은 혼란을 일으켜 올바른 결정들을 할 수 없게 됨
올바르게 사용되었더라면 축복이 될 음악이 잘못 사용될 때는 사단의 효과적인 도구가 된다.
시끄러운 음악과 요란한 리듬들이 축제 교회 예배 형식을 타고 교회에 자리 잡았다. 어떤 이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만일 축제 예배가 전혀 교회에 나가지 않던 자들을 교회에 오도록 한다면 좋은 것이 아니냐?”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난잡한 음악으로써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하실 지도 모르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 예배만을 받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진정한 신앙의 부흥이란, 마치 옛적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견책의 기별을 받았을 때 즉시 마음을 겸비하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간 것처럼,
열광적인 기쁨은 별로 없을지 모르나 오히려 마음을 깊이 살피고, 죄를 고백하고, 세상을 버리며, 주님을 만나기 위해 간절히 소원하며 끈기 있는 기도와 확고한 헌신을 주께 드리는 것이다.
오순절파 형식의 프로그램들이 무리들, 심지어는 “대중”을 끄는 데 있어서 굉장히 성공적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표면적으로 부흥을 판단할 수는 없다.
축제식 예배 형태를 도입한 교회들에 몰려드는 대중들을 보면 그것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인데,
거기에는 피상적인 회심이 넘칠 것이며,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연합하고 산 관계를 맺은 적이 없는 피상적인 많은 신자들로
교회가 가득 차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축제 예배” 라 불리는 오순절 교회의 예배 형식을 보면, 그 예배는 크고 꿍꽝거리는 음악으로 이루어지며,
손과 몸을 흔들고 성경은 아주 조금만 가르치는 형식의 예배이다.
또한 기도로 병을 고치는 치유의 기적들이 일어난다고 하고(나중에 가서 보면 다시 증상이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음),
진정으로 회개하여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임으로 새로운 생애와 성품으로 변화하는 참된 개심의 경험이 전혀 수반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죄된 생활에서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주실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 스스로를 위해 예배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가 아니라 그들의 귀를 아니 오감을 즐겁게 하기 위한 한 “축제”에 불과할 뿐이다.
참된 성령의 역사는 조용하며 깊다. 그곳에서는 진정한 개심의 변화가 수반된다.
자신의 마음대로 또는 기호에 따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볼” 것이다(엡 5:10).
그리고 그에 합당한 성령의 열매를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 등을 그들의 삶 속에서 맺을 것이다.
온 우주에 셀 수 없이 수많은 별들(행성들)을 창조하시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주 정확하게 움직이시는 질서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무질서하고 방정맞게 소리지르는 인간의 예배를 받으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우리 주위의 자연계를 볼 때에도 상식적으로도 “축제식 예배”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갈멜산에서 850명의 이교도 제사장들과 홀로 하나님 편에 서서 싸운 엘리야의 경험을 통해 볼 때에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우리의 제사는 시끄럽게 정신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또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간구할 때 받으실 만한 것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엄숙하고, 신성하며, 지성적이어야 한다.
어떠한 세상적이나 표면적인 예배가 있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가 최후의 선과 악의 싸움에 있어서 참된 백성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마지막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들에 의해 모양뿐인 신앙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진행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안전하게 하나님의 편에 서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찾고 말씀대로 행할 때에만 위험이 없다.
지금 많은 교회들에서 축제식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리고 그 예배 형식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 모으고 있다.
교회들은 단지 교인 숫자의 “성장”만을 추구하여 축제예배 형식을 따르고, 칭송하고, 확장시키며, 오순절주의로 쏠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때에 우리는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며,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 축제예배 형식은 마지막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일어날 진짜 부흥이 있기 전에 나타날 사단의 거대한 거짓 부흥의 시작일지 모른다.
함께 휩쓸려 껑충껑충 뛰기 전에 한번 생각해 보자! 그리고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를 드리자!
(각종 예배시에 보기 싫은 모습들)
악기 동원하여 노래하고 몸 흔들며 소리소리 지르고 눈물 콧물 다 흘리는것이나
집회나 기도회 중에 미친듯이 열광적으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입신하여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는 모습 이떤이는 이것을 성령충만한 집회라고 하지만 절대 그렇치가 않다
TV 에서 비춰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민망스럽고 부끄러운지 기독교인으로서 낯이 뜨거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지는 심정이다
오늘날 스스로 신령하다 하는 목사들이 부흥회에서 주장하는것들을 보면....내가 안수를 하면 안수받은 사람이 쓰러진다. 모든 질병과 사고와 생의 고난은 다 귀신이 들려서 일어나는 것이니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
공중권세를 잡은 악마를 내쫓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다. 축사야 말로 은사의 가장 높은 것이다. 또는 입신을 하고자 하는 교인들은 포대기를 뒤집어 쓰고 누워있으면 입신을 하게 된다...
방언을 해야 성령 세례를 받은 표시이지 방언을 못하면 신앙의 수준이 낮은 것이다라는 둥 각양각색의 옳지못한 주장을 하고
그런 행위들를 하고 있다
(특별히 뜨겁게(?) 찬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 세우는 대표적 성경구절)
시편 150:5)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찌어다
(시편 47:1)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찌어다
예레미아 33:3)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바른번역:(부르짖으라가 아니라 부르라이다 "CALL" )
삼하6-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 하더라
삼하6-14~15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변론) 아프리카 여러 나라 교회는 구교 신교를 막론하고 교인들이나 신부 목사가 예배 시간에 저절로 몸이 움직입니다. 발을 구르고 손을 흔들리대요. 그러면서 찬양하는데 그것이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아프리카나 남미의 교인들은 이렇게 여러개의 전자 음향 악기나 찬란한 조명이나 무용복을 준비하지 않았어도... 그 때 그 때 마음에 감동을 받아 우러나오는 대로 노래하고 춤을 춥니다.
그 예배 장면을 보고 경건하지 못하다고 비난을 하면 안되겠지요
물론이다 그 아프리카사람들의 민족정서 풍속 또는 나름대로의 순수한 감성까지를 싸잡아서 비난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참으로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될수도 있는것이기 때문이다
이글이 말하고있는 경건한 예배를 주장하는 내용들은
단순하고 기본적인 교회의 성가대와 악기자체를 거부하는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지나친 악기들의 남용과 오용 (큰소리로 외치며 드럼과 요란한 음악과 춤들...)그리고 광적인 분위기와 태도
또한 거짓방언들의 혼잡한 소리 ...등을 지적하는것이며 (이것이 과연 성령충만이라 할수 있겠는가)
그러한 모든 요소들로 인하여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혼란을 주게 만들어서
무아지경의 감정적인 상태로 몰입시키는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의 불경건함을 경계하는것이다
(두번째 글)
종교적 쇼를 중단하라!
오늘 날 기독교 안에 진정한 예배의 경험자들이 감소되어 가고 명목상의 말뿐인 적당하고 편안한 그리스도인(?)들이 늘어가자,
교회 안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자, 예배에서 사라진 성령의 역사의 결핍을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 소위 ‘복음주의적 예배 형식’인 ‘축제교회’의 예배 형태들이 기독교를 침투하게 되었다.
지금 전 세계 수백만의 복음주의자들은 축제예배 형식인 ‘종교적인 쇼’, 연예오락에 몰두해 있다.
그들은 신나는 빠른 템포의 음악과 감정을 자극하는 낭만주의적인 분위기의 노래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여 성령의 조용하고 엄숙한 임재 대신에,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음악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취하게 하여 신자들을 기만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연예오락이 그리스도 교회를 온통 타락시켰기 때문에,
수백만의 사람들은 그것이 이단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종교적 쇼에는 악취가 난다.
종교적 쇼의 진행자들이 성소로 들어갈 때 그들은 여호와께 이상한 불을 드리는 위험스러운 짓을 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종교적 쇼는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그것은 기도와 성령님의 감동을 대신하려는
가련한 시도에 불과하다.
그들의 그런 예배방식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육신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다.
교회 안에 들어 온 연예오락
오늘 날에는 연예오락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연예오락 없는 삶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
마치 마약 중독자가 날마다 헤로인을 맞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은 연예인이나 기타 심리적 중독이 주는 위안을 얻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여러 세기 동안 교회는 온갖 형태의 세상적 연예오락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견지해 왔다.
왜냐하면 교회는 연예오락의 본질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예오락은 우리의 시간을 빼앗는 도둑이요,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양심의 소리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요, 도덕적인 책임으로 관심을 돌리지 못하게 막는 교묘한 수단이었다.
이런 교회의 태도 때문에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교회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교회는 점점 세상의 비판에 염증을 내며 세상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지금 ‘연예오락’이라는 큰 신(神)을 이길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그와 연합하여 그의 힘을 이용하는 편이 더 낫다고 잠정 결론을 내린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세상적 연예오락을 제공하는 데 수백만 달러의 돈을 쏟아 붓는 놀랍고 희한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기독교적 연예오락이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일들을 몰아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여러 곳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다. 많은 교회가 삼류 극장과 유사해진 것이다.
거기서 삼류 제작자들이 저급한 작품을 퍼뜨리고 있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비행(非行)을 변호하기 위해 성경 본문까지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예오락이라는 큰 신이 그의 추종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방법은 주로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본래 어린아이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성향’이 오늘 날 ‘성장이 더딘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성숙한 신앙에 이르지 못한 부끄러운 기독교인들이 자꾸 기독교가 재미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희한한 단체들이 생겨나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애쓴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기독교와 연예오락을 혼합하겠다는 목적 하나로 설립되고 존재하는 단체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연예오락을 받아들인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실패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의 성도들이 소중히 여겼던 하나님과의 관계, 진정한 예배와 경건의 훈련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이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런 것은 너무 진부하고 느리다. 그들은 화려한 매력과 빠른 극적인 활동을 원한다.
그들은 성경을 한 장 읽고 짧게 기도한 다음 황급히 바깥으로 나간다.
왜냐하면 또 다른 집회에 가거나 아니면 최근 먼 곳에서 돌아왔다는 종교적 모험가의 스릴 넘치는 간증을 듣고 자기 내면의 깊은 영적인 공허를 메우기 위해서이다.
이런 얄팍한 신앙의 비극적인 결과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깊이 없는 사랑, 속 빈 신앙관, 재미에 치우치는 신앙 집회, 예배에 들여 온 세속적인 음악, 축제식 예배 형태,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 종교적인 형식에 의지하려는 태도, 동호회 모임과 같은 친교 활동, 세상적 판촉 활동의 도입,
인간의 열정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오해, 이런 것들이 바로 그런 비극적 결과들이다.
음악과 쇼
집회에서 부르는 많은 음악들에서도 성령님의 감화보다는 낭만적인 분위기가 더욱 더 지배적이다.
이미 오래 전에 기독교 음악은 ‘왜곡되고 약해진 신앙’의 희생물이 되었다.
잘못된 것을 보고도 참는 것이 ‘사랑’이라는 잘못된 생각은 우리의 찬송가와 기독교 문학을 망쳤다.
과거 나이트클럽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댄스 리듬이 소위 복음성가라고 불리는 곡들에 들어 있으며,
그런 노래의 곡이나 가사는 욕망을 자극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노래 속에서 그리스도를 모신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그분에게 나타내는 친밀감은 그분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부적절한 경우가 많으며, 또 그것은 그분을 숭모하는 성도의 경외스러운 친밀감이 아니라,
육욕적인 연인의 무례한 친밀감을 표시한 듯한 인상을 준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너무 대중화되었기 때문에 영화관에서도 종교영화를 볼 수 있고, 라디오나 댄스파티에서도 기독교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기독교는 또 하나의 오락이 되어 버렸다. 이제 더 이상 기독교의 능력은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죄의 깨달음과 회개와 경건한 슬픔은 거의 없어져 버렸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보다 자신과 육신의 행복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행복감을 얻지 못할 경우 다른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행복해지려고 매우 애를 쓴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종교적 크리스천 로큰롤(rock-and-roll)을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에 호소하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리듬과 화음과 곡조로 된 복음성가들을 부르는 것이다.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이 무용음악에 쓰이는 그 많은 타악기들과 드럼과 전자기타들과 쇼와 영화에서나 사용됨직한 도구들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부추겨 축하해 주고, 분위기를 북돋으려고 애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쁨으로 넘치는 사람은 다른 것은 아예 찾지 않는 법이다.
쾌활하고 자신감에 차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와는 그다지 닮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경축의 종을 울리는 일을 좋아하고 마치 게임 쇼의 진행자처럼 활력이 넘친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육신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세상의 나이트클럽에 마음 놓고 갈 수 없어서 교회를 나이트클럽처럼 활용하는 것뿐이다.
이제까지 기독교의 예배의 질은 점점 쇠퇴의 길을 걸어온 반면, 즐거움을 얻기 위한 종교적 연예오락은 계속 번성해 왔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애쓴다.
크리스천들은 성령님의 술을 즐길 수 없을 때 육신의 술을 찾는다. 지난 25년 동안 보수적 크리스천들이 그랬다.
기쁨이 없고 메말라 있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오락거리에서 기쁨의 단물을 짜내려고 애썼다.
그들이 아는 유일한 종교적인 기쁨이란 복음성가를 대중가요처럼 부르는 것이었다.
죄악된 쾌락들
오늘날은 경건한 예배를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많은 영적인 지도자들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며 또 신도들에게 가르쳐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참 행복의 방법을 모른다.
그래서 결국 먹고 마시고 요란스레 행사를 치러야만 행복을 느끼는 체질로 변하고 말았다.
복음주의적 교회는 이런 체질을 바꾸지 못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성령님이 자기에게 반드시 필요한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령님의 불이 아닌 다른 불 옆에 서서 불을 쬐며 따뜻하게 기운을 북돋우는 방법을 배운 사람들이다
더욱 잘못된 것은, 많은 출판업자들과 음반 제작자들이 그런 방법을 적극 권장한다는 점이다.
미국의 기독교 소설들은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성(性)을 이용한다. 그런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만일 낭만과 기독교를 결합시켜서 한편의 이야기를 만들면 순수 기독교 소설을 읽지 않을 보통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읽고 복음에 접하게 될 것이라는 얄팍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기독교 로맨스 소설’이라는 개념 자체가 건전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육욕적 충동과 성령님의 깊고 감미로운 감동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성애, 즉 에로스가 영광의 주님을 섬기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관객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광고에 관능적인 장면을 사용하는 종교 영화는 그리스도에 완전히 역행한다.
오직 영적으로 눈먼 사람만이 그런 영화에 현혹될 것이다.
죄가 우리 인간에게 가져다 준 가장 비극적인 결과 중 하나는 우리의 올바른 감정이 질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웃기지도 않는 것을 보고 웃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들에서 쾌락을 느끼며, 정상적으로는 애정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들을 보고 기뻐한다.
참 성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죄악된 쾌락에 대한 저항’은 다른 말로 ‘인간 감정의 타락에 대한 항거’이다.
쇠퇴해가는 예배의 질과 기독교 신앙
오늘날 교회는 도처에서 출현하고 있는 아마추어들 때문에 고통 당하고 있다.
훈련받지 못했고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영적이지 않은 야심에 찬 수다쟁이가 신앙의 길로 돌아선 것처럼 행세한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고 그의 말을 듣기 위해 강사료를 지불하고 무대에 세워 그를 도우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한 자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에게 현혹되는 사람들은 참 예배자가 아니다
. 참 예배자는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종교 프로젝트에 빠지지 않는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영화관 다음으로 연예오락성이 강한 장소를 찾으라면 교회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교회에서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지도적인 위치에서 일한다.
그러다 보니 성령님의 은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인식되거나 사용되지 못한다. 성령님이 개입하지 않으시고 오직 인간의 재능만으로 교회가 지역사회에서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종교적인 활동에 불과하다.
이런 일이 계속될 경우 신자들은 그 두렵고 큰 날이 도래하기까지 거의 개선되지 않은 신앙을 품은 채 생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날에는 자가발전하여 사용한 재능은 전부 불에 타 버리고, 오직 성령님의 인도 가운데 행한 일들만 남을 것이다.
교회는 단순한 종교 단체가 아니다.
교회는 공연자들이 공연하고 관객이 돈을 지불하는 종교 극장이 아니다. 교회는 구속받은 죄인들이 모인 곳이다.
하나님에게 인도함을 받아 그리스도께 나아온 그들은 그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사명을 받은 이들이다.
오늘날 아주 많은 교회 건물과 종교 기관의 건물들이 크게 건축되고 있다.
그리고 교회 신자의 증가율이 인구 증가율을 앞지른다.
갖가지 종교가 사회의 각계각층과 각 연령층의 사람들 중에서 개종자를 얻으려고 애쓴다.
특히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을 개종시키려고 열성이다. 그들은 확성기를 장치한 선전트럭, 라디오, 텔레비전, 전철광고, 광고 게시판, 네온사인, 음료수병과 풍선을 이용한 광고 등을 활용한다.
또 그들은 드라마, 마술사, 훈련된 말과 개와 카나리아, 복화술을 하는 사람 등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려고 애쓴다.
또한 수많은 동업자 조합, 상공인 클럽, 비즈니스맨 협회에서도 기독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한 모임과 교제를 제공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나선다. 직업적인 연예인들의 레퍼토리에 기독교적인 노래가 포함되는가 하면, 나이트클럽의 연예인, 프로 권투선수, 유명 영화배우, 심지어 감옥에 갇힌 갱도 기독교를 퍼뜨리는 데 앞장선다.
그러나 이 갱은 이제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하여 아직까지 애통하거나 회개하는 증거를 보여주지 않았다.
놀랍게도 기독교는 이제 큰 사업이 되어 버렸다.
복음주의적 교회에서는 교인들에게(특히 젊은이들에게) 진지한 교육 프로그램은 최대한 적게 제공하고 연예오락을 최대한 많이 공급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오직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며 그분을 사모하는 모임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은 이제 거의 불가능해졌다.
이런 현상으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싫증이 났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종교영화, 게임, 기분전환용 오락 같은 ‘막대사탕’을 주지 않는다면 집회에 나오지 않는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교회 분위기 자체가 바뀌게 되었고,
심지어 ‘황금 송아지’를 모시느라 교회의 건축양식까지 바꾸기도 한다.
우리의 신조는 정통에서 이탈한 변종이 되어버렸고, 우리의 신앙 관습은 이단에 빠졌다.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막대사탕 작전은 우리의 사고에 너무나 깊이 파고 들어왔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잘못된 현상으로 피해를 보면서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교훈이 아니라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있다.
황금송아지를 섬기는 현대 기독교에 대해 비판이 제기되면, 황금송아지 숭배자들은
“그래도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이끌지 않느냐?”라고 대답한다.
도대체 그들을 어디로 이끈다는 말인가? 참 제자의 길로?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자기부정으로? 세상을 거부하는 믿음으로?
거룩한 삶과 성품으로? 세상의 좋은 것들에 초연해지는 성숙함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온전한 헌신으로? 유감스럽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노(No)’이다.
요즈음처럼 진정한 영적 예배가 낮은 수준에 처했던 적이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길이 없다.
목회자들에게 가해지는 압박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시대에 사는 목회자와 교회는 질적 가치를 희생해서라도 양적 팽창을 추구하고, 정상적인 성장을 통해서 얻을 수 없는 것을 과장을 통해서라도 얻고자 하는 유혹에 시달린다.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구성된 대중은 소리 높여 양적 팽창을 주장하며, 영원하고 충실한 가치를 추구하는 목사를 용서하지 않으려고 한다.
목회자의 느린 방법을 비웃으며 빠른 결과와 인기 영합만을 요구하는 ‘잘못 배운’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잔인하게 압력을 가한다. 그들은 스릴 넘치는 일에 목말라 있다.
그러면서도 감히 나이트클럽에는 가지 못하겠고 그런 것들을 도리어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연예 오락과 흥미거리에 따라서 운영되는 교회는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참 교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얄팍한 자극을 갈망하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표시이다.
주일마다 사이비 기독교의 자극으로 짜릿함을 느껴보려는 ‘세례받은 속물집단’은 참신자의 무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말로는 성경을 믿는다고 주장해도 그들은 참 그리스도인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는다.
신실한 목회자는 세속적인 방식을 교회 예배에 도입하여서라도 교인 수를 늘리고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든가,
아니면 점점 인기가 없어지는 참 예배의 경건한 방식을 그대로 따름으로 양적인 성장을 포기하든가 둘 중에 결정을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목회자의 책임도 되지만, 철없는 교인들의 영적 수준 때문에 빚어지는 결과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 현대 목회자들의 딜레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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