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묵상

(9/23)사무엘하 <13:15-13:22> 버림받은 다말

행복한순례자 2008. 9. 23. 10:00

2008년 9월 23일 화요일 사무엘하 13:15~22
15 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
= 암논의 사랑이(사랑이란 말은 적당치 않지만)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 욕망적이었는 지를 본문은 보여준다. 우리들의 욕망이 이런 경우가 있다. 그것이 없으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지만 정작 취했을 때는 그것이 내 모든 욕구의 최선도 대안도 아님을 알게 되고 우리는 그 욕망이 채워진 순간부터 그 존재를 무가치하게 생각하게 된다. 암논은 그 욕망이 채워지자 마자 일어나 가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욕망은 허상이었다. 진정한 사랑은 기다릴줄 안다. 마틴 부버의 이야기 처럼 욕망이 앞설때, ‘나와 너’의 관계가 아닌 ‘나와 그것’의 관계로 전락한다. 암논은 실제로 허상을 사랑했던 것이다. 다말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동물적 성욕을 채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과연 이것만인가? 물욕, 명예욕 등 그 모든 것에서 우리는 이런 허상을 추구할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것을 취하고 나서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 때가 얼마나 많은가?(종종 할인점에서 싸다는 이름 하에 또 이때 아니고선 살 기회가 없다는 생각하에 샀다가 제대로 쓰지도 않거나 먹지 못해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는 내 모습을 본다.)

16 다말이 그에게 이르되 옳지 아니하다 나를 쫓아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하되 암논이 그를 듣지 아니하고
= 다말은 이 일이 악함을 말하지만 암논은 이미 듣지 않는다. 악은 더 큰 악으로 나아가게 된다. 악은 그 사람의 심령을 무디게 한다. 앞서 14절에서도 그는 듣지 않는다. 14절에서 다말의 말을 듣지 않는 다고 표현한 반면에 본문은 그를 듣지 않는다. 지나친 해석일수 있지만 그의 왜곡된 심령은 이제 다말 자체의 거부로 이어지는 것을 본문이 보여준다고 할수 있다.

17 그가 부리는 종을 불러 이르되 이 계집을 내게서 이제 내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라 하니
= 앞서 암논은 나의 누이라고 다말을 불렀지만 이제 다말은 ‘이 계집’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제 다말에 대한 그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여준다. 또한 이제 자신이 직접 보내는 것이 아니라 부리는 종에게 명령을 내린다. 아프다는 핑계하에 왕에게까지 요청했던 그가 이제 다말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그는 취할 줄은 알았지만 정작 책임지는 모습은 없다. 이 시대 사랑이 이렇지 않은가?

18 암논의 하인이 그를 끌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니라 다말이 채색옷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라
19 다말이 재를 자기의 머리에 덮어쓰고 그의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가서 크게 울부짖으니라
= 내보내자 마자 문을 잠근다. 기본적인 예우도 없다. 다말의 상처와 아픔!

20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되 네 오라버니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그는 네 오라버니이니 누이야 지금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라 하니라 이에 다말이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
21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22 압살롬은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미워하여 암논에 대하여 잘잘못을 압살롬이 말하지 아니하니라
= 다윗이 이 일에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조치를 취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로인해 모든 증오는 단지 잠시 수면아래로 감추어졌을 뿐이다. 어쩌면 다윗은 밧세바 사건으로 인해 자신이 이 일을 처리하기에는 큰 부담을 가졌을 지 모른다. 자신이 떳떳하지 못하기에 이런 성적 죄악의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에 심히 노하긴 하지만 구체적인 치리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유보는 결국 또다른 불씨를 제공할 뿐이다. 다윗이 비록 자기 자식들이 얽힌 부끄러운 문제이고 자기의 죄에 대한 부담이 있더라도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시비를 가리고 처리했다면 그 이후의 더욱 큰 불행을 초래하진 않았을 지 모른다. 우리는 당장의 부담으로 인해 본질을 회피함으로써 결국 더 큰 불행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일을 자주 본다. 이것은 개인이나 공동체 모두 해당되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끊어내지 못한 죄들은 더큰 죄의 모습으로 다가오며 또한 교회도 교회내의 죄적 요소들을 치리하지 못할 때 교회는 더욱 큰 죄의 문제속에서 교회의 본질마저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현재 한국교회의 위기는 결국 이러한 죄의 간과에서 온것 아닐까? 아니 내자신의 현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 다말의 불행한 이후의 삶. 우리들도 상처입은 이들의 어떤 치유나 보상없이 그냥 놓아두는 경우는 없는가? 그저 우리 기억 속에서 잊어버리거나 방치 함으로서 그들을 더욱 소외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때 열심있었으나 어느순간 기억의 뒤편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어떤 형태로 상처입었는가는 둘째치고라도) 단순한 분노는 어떤 해결책이 아니다. 잠깐 상처입은 이들의 아픔에 동참은 하는 것 같지만 그저 한때에 그처 버리고 진정 도움이 필요할때 혼자 남아 있는 이들은 없는 지 돌아 보아야 한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압살롬의 경우처럼 또다른 곳으로 그 불길이 번지기 마련이다.
= 압살롬의 침묵은 외형적으로는 그의 인격의 깊이를 보여주는 듯하다. 겉으로 그의 표현은 인내하는 이처럼 비쳐진다. 그러나 그는 복수에 대해 기다릴줄 아는 이였다. 그 기다리는 동안 칼을 갈줄 아는 이였다. 이어지는 본문 들 속에서 어떻게 복수를 행하며 악을 행하는 지를 보라. 암논을 살해하고 반란을 꾀할때도 역시 그는 오랜 세월을 기다릴줄 아는 이였다.그는 쉽게 분노하거나 감정의 준동으로 행하는 이가 아니다. 그러기에 그의 분노는 더욱 무섭다. 그는 인내할줄줄은 알았지만 그의 내면은 해결되지 못함으로 오는 강한 쓴뿌리와 분노가 있었다. 외형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