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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산다고 선언 하시겠습니까?

행복한순례자 2008. 12. 12. 10:19
[칼럼] 나그네가 만난 예수(4) | 주사랑 칼럼
전체공개 2008.10.10 04:13

 

(사진: 해와달 갤러리- 원 강 님)

사람이 빵으로만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특별히 예수는 우리를 대신하여 마귀에게 시험을 당할 때 대항한 말씀이 분명 빵으로만 입니다. 번역에따라서 떡이라고도 합니다만 사람에게 먹는것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아담이 첫번째 마귀의 시험에서 실패한 결과로 생령에서 육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의 아담은 동산안에 있는 모든 열매를 자유롭게 먹을수가 있었습니다만 그 의미는 어쩌면 안먹어도 살수 있지는 않았을가하는 개인적인 추론을 해봅니다. 아니면 그 당시에도 먹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육체가된 인간들처럼 음식을 섭취해야만 생명이 과연 유지되는 것일까를 생각해 봤을때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아담은 먹지 않아도 죽지 않았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죄가 없으면 영원히 살수 있기 때문이고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이유가 죄때문이라는 성경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이유가 죄를 없이하기 위하여 이기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먹어야 삽니다. 물론 수명이 다하면 정한대로 노화 되거나 병이들거나 여러가지 이유로 죽음을 당하겠지만 죽는날까지는 먹어야 하는 운명입니다. 지금 예수는 사십일 동안 먹지를 못했습니다. 사람과 같은 몸을 입고 사람과 같이 되었기에 먹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식하실때에 시험을 당하십니다. 무엇이든지 먹을 수만 있다면 먹을수 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을 갖고 계심입니다. 먹을 힘도 없지만 만일 먹을 것이 눈앞에 손에 잡혀있다면 본능적으로 먹었을 것입니다. 오랜기간을 주리게 되면 인간의 이성이 정상적으로 작용을 하지 못합니다. 헛것이 보이기도 하며 환상에 같히기도하고 아무튼 보통 때와는 모든 면에서 정상적으로 혹은 인간의 상식적으로 분별하거나 판단할 수가 없는 최악의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이 순간에 마귀가 다가와서 유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이 돌들이 보이시오, 당장에 빵을 만들어 보시오. 충분한 능력이 있지 않소. 얼마나 솔깃한 아이디어인가요? 문제해결의 방법인거 같습니다. 배가 고파서 굶주린 사람에게 저기 가면 먹을것이 공짜로 널려 있으니 가보시오. 지금 눈을 들어 저쪽을 보시오. 맛있는 빵이 넘처 난다오. 맘대로 먹으시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오. 괜찮으니 당장에 배고픔을 면해서 살아야 하지 않겠소. 여기는 광야라서 아무도 없다오. 나만 눈 감으면 아무도 모르니 걱정말고 먹으시오. 예수여. 당신이 굶는다고 누가 알아준단 말이오. 어리석게 굴지말고 즉시 돌들로 빵을 만들어 보시오.

 

사단은 얼마나 교묘 한지요. 우리의 삶속에 깊숙히 개입하여서 기회 있을 때마다 속삭이지요. 괜찮다구. 그냥 먹어라. 누가 보나? 일단 먹고 살아야하지 않는가? 그래야 주를 위하여 쓸모있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보같은 믿음 지키려고 굶는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공연히 굶어서 병들어서 죽는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욕을 먹게되지. 기운을 내어서 큰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주님도 기뻐하시지 자 어서 먹으라구. 괜찮아, 절대로 죽지 않는다구.

 

우리는 계속해서 이러한 소리를 알게 모르게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엉뚱한 곳에 마음을 빼앗기게도 하며 정신을 혼란하게 만들어서 이리 저리 헤매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동원해서 성도의 마음을 빼앗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영광의 광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데 개으르게 만들고 적극적으로는 거역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거역하는 방법이 매우 치밀하고 교묘해서 자기는 정말로 예수를 따르고 그의 의를 구한다고 속이는 것입니다. 교회를 보십시오. 전부가 예수를 잘 믿고 충성 한다는 사람들이 서로 싸움을 하지요? 나는 정말 바르게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너는 틀렸다고 정죄합니다.

 

말은 예수 예수 하면서도 정작 삶속에서는 예수처럼 살지 않습니다. 조금도 손해를 안보려고 하고 조금만 억울하거나 맘이 상하게 되면 결사적으로 논쟁을 하고 송사를 해서 기어이 승리하고야 말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쪼개지고 갈라지고 나가라 못나간다 가지고 평생을 상처를 주고 받고 울고 불고 회개하고 저주하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사단의 전략이 적중하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고 있으니 이제는 무감각 해져서 그저 그러려니 하고는 강 건너 불구경 하기까지 왔습니다. 이제는 혼동가운데 누가 옳은지 그른지 조차 파악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하자면 그나물에 그밥이다는 것이지요.

 

무엇으로 살까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무엇으로 사는가를 분명하게 정하지 않는다면 미혹의 시대속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많은것이 필요하다고 광고를 합니다. 눈만 뜨면 지속적으로 나오는 광고의 홍수속에서 우리의 이성은 이미 혼란으로 가득하여져서 바른 가치관을 추구할수 없도록 마비 시켰습니다. 아무리 도덕과 윤리를 가르쳐도 집 밖에만 나가면 온통 외곡된 가치관으로 도배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이미 부모의 눈밖에 벗어나서는 세상의 비뚤어진 가치에 잠식을 당해버렸습니다. 돈이면 다다는 물질 만능주의는 버젓이 학원 건물 사이 사이에 성인전용 문화(?)시설이 성업중이고 그시간에 드나드는 학생들의 시각을 마비시켜 버리는 세상입니다.

 

최소한의 도덕적 교육적인 배려조차도 없이 유치원 건물들의 주변에 보기에도 민망한 업소의 광고들이 활개를 치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성인 광고지들은 갈수록 진화를 거듭하고 그것들을 밟으면서 미래의 주역들의 마음이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과 휴대폰의 증가는 이미 아이들마져 중독되게 만들어 버렸고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음란물을 쉽게 볼수 있는 사각지대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가정의 붕괴는 갈수록 심해질 것이고 그 여파는 고스란이 모든 사람들이 받아야할 것입니다. 나만은 괜찮다고 내 아이만은 걱정 없노라고 하기에는 너무 무서운 세상이 아닌가요?

 

그래도 돈만 있으면 행복하고 잘살거라고 세상은 계속 광고를 합니다. 빵이 충분하면 배부르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빵을 위해서 무엇을 하던지 열심히만 하라고 독려합니다. 많이만 팔면 되니까 음식에 넣어서는 안되는것도 시간을 단축하고 원가를 절감하려고 무리하게 눈을 감아 버립니다. 철저하게 관리 감시를 해야할 사람들은 뒤로 들어오는 눈먼 돈뭉치의 향기에 취해서 이성이 마비된듯이 결제를 해버리고 허가를 승인해 버립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먹거리로 진통을 앓고 있지만 조금남 시간이 지나면 또 어디에서 무슨짓을 할 지 모르게 된 세상입니다. 무엇하나 마음놓고 먹을 수가 없는 세상이지요. 그러니까 더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치관은 여전히 빵으로만 살려고 하지 않습니까?

 

말씀으로 살것이라

 

예수를 시험하는 마귀의 소리가 오늘도 우리의 귓가를 파고 들고 있습니다. 교회안에서도 그런것은 아닌가 걱정입니다. 오로지 복을 받는 것이 성공이고 출세라고만 믿고 있고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가난이 자랑은 아니라도 불의하게 부자로 사는것보다는 의롭게 살다가 가난한 것이 옳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난은 믿음이 부족한 것으로 정죄를 당하는 교회와 신앙속에서 성도들은 당연하게도 세상에서 빵을 위하여 달릴수 밖에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께 정성들여서 많은 빵을 드려서 영광을 돌리는가를 지속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빵을 구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복을 추구하라고 부추기지요.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를 따르는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면 성도의 가난이 결코 부끄러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성도가 가난하고 병이들면 죄인아닌 죄인이 되어 버립니다. 어떻게 믿었길래 그모양으로 사는가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성도가 부자로 살고 넉넉해야 한다고 합니다. 참 듣기 좋은 소리지요. 누가 가난하게 살기를 원할까요? 그러나 예수를 따르고 그의 가르침대로 살려면은 가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안오나가 그러나 봅니다. 예수를 따르던 많은 무리들도 결국은 예수의 말씀에 걸려서 그 후에 오지를 않고 떠나버립니다. 진실을 말하니까 떠납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질문 합니다.

 

오늘 가르치는 자들은 솔직하게 전해야 합니다. 무조건 많이만 모이게 하려고 더하거나 빼면은 안됩니다. 예수를 정확하게 전하면 그렇게 많이 오지 않는게 정상입니다. 왜곡시키고 변질시켜서 사람의 마음에 쏙 드는 예수를 전하니까 구름처럼 몰려 오는것은 아닐까요? 예수의 공생애 삼년은 겨우 열두 제자를 만들었습니다. 그중에 한 제자는 배반을 하였고 십자가를 질 때 모두 뿔뿔히 도망을 간 못난 사람들 이었습니다. 제자들을 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예수와 함께 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어 놓아야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기적과 표적을 보고 빵을 먹고 배부른 이유로 몰려 왔던 군중들은 결국은 다 떠나 버렸습니다. 그래도 예수는 잡지 않았습니다. 오는자는 거절하지 않아도 가는자를 잡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요즘 교회는 어떻게든 잡으려고 하고 오게 하려고 예수 더하기 무엇을 첨가를 해서 전도를 하는것은 아닐런지요. 오직 예수를 전하면 오지 않는게 맞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이라해도 오직 예수때문에 남아 있는 자들이 참된 가치를 알고 따르는 제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를 믿고 살아가려면 빵으로만 살아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빵으로만 살려면은 예수와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역시 빵으로만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신명기8장 3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너희도 알지 못하고 너희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다.(신8:3)

 

광야의 만나가 예수입니다. 모세의 입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것은 예수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이제 빵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도록 불러냄을 받았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를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이 곧 말씀으로 사는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의 삶을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이제 나의 모든 삶에서 기준이 내가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사람들의 유전이나 철학이나 지식이 아니라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의 삶이 모범이고 기준이며 그의 가르침이 삶이되는 것입니다.

 

어렵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송두리채 부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아니라고 말해야 하며 예수의 뜻이 옳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는 선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며 철저하게 부패하였고 죄가운데 빠져 나올수가 없다는 것을 보고 알고 애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하면 저사람 보다는 좀 다르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아예 빼버려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엎드려야 합니다. 우리안에 성령이 오셔서 능력을 주셔서 광야로 가라할 때 그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예수를 만나지 않으면 다시 우리는 빵만을 위해서 광야를 뒤로한체 세상으로 애굽으로 도망 갈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말씀으로 살지 아니하면 말씀을 먹지 아니하면 결국은 빵을 먹기위하여 애굽으로 돌아갈 궁리만 하다가 기회가 오면 뒤도 안돌아 보고 달려갈 것입니다. 도망가면 잡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끝까지 잡을거라고 안심하기에는 우리의 옛 본성과 자아가 죽지 못한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안죽었기에 반응 하는것을 인정하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며 어찌할고 탄식하면서 주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넘어져도 주를 보는자는 살아납니다. 주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를 보고 세상을 보고 죄책가운데 머무르면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산다고 선언 하시겠습니까? 

2008-10-10.[나그네 칼럼] 제 14 호 http://cafe.naver.com/pray153/7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