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란 먼저 개인적인 결단과 주님과의 관계이지만 그것이 완성이나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출발이며 시작에 불과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공생을 통해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공동체를 세우심과 연관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베드로 사도의 성령에 의한 고백위에 주님께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오순절 날이 이르러 마가의 다락방에서 실현되었습니다. 그 신약의 교회의 태동으로 초대교회 공동체가 시작 되었고 그 뒤를 이어 계속해서 성령의 역사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이어져 왔습니다. 그 공동체가 오늘날 우리가 믿고 싶은 부정하고 싶지않은 개혁교회라고 과연 확신할수 있을까요?
이미 역사적으로 구교(로마 카토릭)에서 전혀 진리와 주님의 뜻을 거슬러서 나아가는 것에 대한 반발로 종교 개혁이 발발했습니다. 그 중심에 루터와 칼빈이 있었고 그들의 개혁은 성공했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개혁자의 후예라고 자부하는 신교(개혁교회또는 개혁주의)의 후예들인 오늘날의 현대 교회의 모습른 이름만 바꿨고 포장만 바꿨고 형식만 변했을 뿐 그토록 비판하고 빠져나오고자 했었던 카토릭의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수없이 많은 교회 제도와 형식과 프로그램과 이미 십자가로 폐하신 날과 달과 절기들이 카토릭 못지않게 개신교회를 장악하고 있는 이 현실을 보면서 누구하나 이의를 말하지 않는것은 어찌된 일일까요? 유명하다고 존경받는 원로 목회자님들이나 차세대 리더로 인정받는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이나 한결같이 이미 폐기처분한 구약시대의 절기에 대하여 기를쓰고 가르치는 현상들...
십일조를 신약의 성도들에게 어떻게 해서든 의무적으로 적용시키는데 주저없이 동의하는 목회자들...주님께서도 명하시지 않았던 각가지 명분의 새벽 특별기도와 심야기도와 철따라 강행하는 심방등...유행처럼 진화하는 부흥성회들...성경 어디에도 없는 기도원을 세우느라 바쁜 대형교회들....그 현상을 보면서 닮고 싶어 애를 태우며 밤새워 기도하는 개척교회 목사님들....
어찌하든지 사람 모으는 방법을 배우느라 공부하는 목사들....
전도를 지상명령이라 성전(교회)건축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치는 목사들....
2009년 부터 이렇게 쓴소리를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왜 요즘 대형교회와 그 중간에서 달려가는 교회와 당회장 목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에게하신 말씀이 오버랩이 되는걸까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마23:2-3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눅20:46-47)
개신교에서 자칭 개혁주의자들이 교황에 대하여 비난을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개신교 당회장이나 노회장이나 신학자들이나 칼빈주의를 강조하는 정통주의자들이나 웨슬레를 압장세우는 감리교단들이나 기타 합동이니 통합이니 하는 수장들을 보면 어쩌면 교황이 받는 대접의 자리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게 보이는걸까요? 저들은 카토릭의 교리나 교황제일주의를 비난하면서 그것을 그대로 따라가는것은 어찌된 일일까요?
제가 감히 사도신경을 걸고 넘어지는것은 결국 그 신경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채우면 마지막 단추는 반드시 어긋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했지만 죄로인하여서 어그러져 버렸습니다. 성경에서 증언하는 죄의 개념은 빗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목표에서 멀리 빗나간것이 죄이며 하나님께서 원래 목적하신 그 목표점에 도달하지 못한것이 죄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합니다. 다윗도 시편에 고백하기를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인생들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자가 있는지 보셨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그 죄를 인하여서 빗나간 목표를 다시 되돌리기 위한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수 많은 짐승들의 희생제사로도 불가능 했습니다. 오직 자기몸을 속죄제물로 십자가에 드리심으로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 제물을 하나님은 원하셨습니다. 단 하나의 속죄양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를 감당하기에 세상의 모든것으로도 불가능 했습니다.
누가 감히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로도 불가합니다. 노아 홍수로 죽은 수 많은 사람들로도 불가능 합니다.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뛰어난 성인들의 죽음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과 순교자들의 피로도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가능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외에는 우리에게 구원은 애당초 없는 것입니다. 그 큰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께서 기꺼이 자발적으로 순종하셔서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고백하는 십자가의 죽으심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와 구속하심과 죄를 단번에 없이하신 구원의 내용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계시된 기록된 성경입니다. 불완전한 인간들을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도도히 흐르는 죄악과 부패와 타락하고 흑암한 세계사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일으키시고 세우셨습니다.
기독교사에서 교회사는 중요합니다. 그것을 전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역사와 전통속에서는 부인할 수 없는 인간들의 무지와 연약함과 악함이 교차하는 것입니다. 시궁창에서도 꽃이 피듯이 도저히 썩을대로 썩은 인간의 제도와 욕심으로 잉태한 유산들의 범람함에도 불구하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그 아들을 보내사 마침내 이루셨습니다.
분명 종교 개혁자들도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신실한 신앙으로 무장했다해도 연약한 인간입니다. 거기에는 이기심과 자기욕심과 정치적인 어쩔수 없는 굴절된 시각과 판단이 필연적으로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오직 성경으로를 주장하는 명분속에 인간 학살이 자행되었던 끔찍한 시대가 분명 역사적으로 존재 합니다. 개혁주의자들의 세도가 힘을 받게 되자 그들과 생각이 다르면 이단이 되고 적이되어버리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를 주창하던 서슬퍼런 칼빈의 개혁에 걸림이 되는 자들이 무수히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아미쉬들이 그랬습니다. 매노나이트들이 그랬습니다. 유아세례를 거부하는것이 죽을 이유가 되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성경에 맞지도 않는것을 다만 당시의 기득권에 의하여 걸림이 되는 이유만으로 이단시 되고 죽어야만 했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왜 주의 거룩한 종이라고 부르짖는 이 땅의 교회는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방관하고 있습니까?
장자 교단이라 큰소리 치며 선지동산의 가장 적절하고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장신대나 총신대의 신학자들과 교수목사님들은 신학생들에게 성도들에게 진실을 가르치지 않는것입니까?
왜 이러한 사실들이 사이버나 웹상에 버젓이 돌아 다니는데도 그 것이 날조된 것이며 거짓이라면 당당하게 가르치지 못하는 것입니까? 알고는 있지만 교단 눈치때문에 목사노릇 못할까봐서 침묵하는것은 아닌가요? 도대체 성령이 임재하는 은사집회나 치유사역자들에게는 진실에 대한 양심에 찌름은 없는것입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목회 후보생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신학박사님들은 수업하기 전에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 가운데 바르게 가르치겠다고 성령의 도우심을 원하면서도 왜 진실을 가르치지 않습니까? 저는 그동안 전혀 몰랐습니다. 가르쳐 주는 이가 없는데 어찌 알겠습니까?
신앙이 회복되고 개혁되기 위하여서는 지도자부터 변해야 합니다. 그 교회의 교인들의 수준은 담임목사의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목사의 신앙관이 진실하지 못하고 바로 알지 못하고 악습과 전통과 낡은 구습에 젖어 있는 한 절대로 진리를 전할 수 없으며 진리를 사랑할 수 없으며 진리에 목숨 걸수도 없습니다. 지금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종이라면 그 자리를 내려 놓으십시오. 그 기득권과 존경의 자리와 명예의 자리에서 한발짝 떨어지십시오. 수천 수만명의 신도들의 환영을 뒤로할 수 있습니까? 목사님 없으면 교회가 무너진다는 그 달콤한 사단의 속삭임을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습니까? 사단의 유혹에 예수님은 단호하게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4:1-11)
이렇게 스스로 개혁되고 낮아짐 없이 외치는 십자가가 무슨 능력이 되며 그 전하는 복음이 과연 복음으로서 능력이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햇습니다. 그 복음의 진수는 예수님처럼 낮아지심입니다. 섬기는 자리요 종의 자리입니다. 지금 한가닥 하시는 목사님들을 보고 누가 섬기는 종이라고 볼수 있을까요? 교회 문턱이 왜 그렇게 높습니까?
왜 오늘날 교회안에서는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습니까?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 :1-13)
십자가의 길이란 어떤 길일까요? 좁은 문이며 좁은 길로 가는 삶입니다. 오직 주의 말씀만이 법이며 삶의 기준이 되는 사람들 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오래된 전통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그래왔으니까 교회에서 행하는 절기와 헌금들과 프로그램을 따라하는게 신앙의 자세일까요? 우리는 십자가의 사람들 입니다. 교회력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가르쳤습니까? 그래서 사도들이 그런 절기와 교회력에 따라서 지키라고 말했습니까?
성탄절을 지키라고 주님이 명하셨니요?
고난주간을 기념하라고 주님이 명하셨나요?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라고 주님이 명하셨나요?
안식일을 지키라고 주님이 명하셨나요?
주일을 지키라고 주님이 명하셨나요?
교회건물을 건축하라고 주님이 명하셨나요?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주님이 명하셨나요?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주님이 명하셨나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의일을 바쳤다고 오늘날도 교회에 바치라고 주님이 친히 명하셨나요? 모든것을 의문에 쓴 증서를 십자가로 폐하시고 종의 멍에를 꺽고 새 생명을 허락하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구원의 복음이 오늘날 어쩌다가 새로운 율법주의와 바리새화와 교회제일주의와 기도만능주의와 주일성수가 마치 믿음의 기준인것처럼 되었습니까?
카토릭의 전통과 예전들이 어찌하여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대치되었단 말입니까? 미사와 예배를 구분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주의 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동안 이렇게 많은 전통들과 예전을 지키느라고 정작 주님께서 주신 구원의 기쁜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체 계속 헛된 절기와 헛된 의식을 지키는 것은 아닌가요? 교회는 그것을 이용하느라 진실을 감추기 바쁜것은 아닌가요?
십자가의 주님을 묵상하면서 왜 슬퍼하시는지요? 그것은 미사드리는 천주교의 산물입니다. 전통적인 유교 불교 문화권과 샤머니즘적인 문화를 교묘하게 접목시킨 것이라고 왜 가르치지 못하는것일까요? 알지 못하는 신에게 조심스럼게 정성을 드리고 공을 쌓고해서 신의 분노를 무마시키려는 이방의 우상숭배와 뭐가 다른가요? 그렇게 주님의 고난을 슬퍼하는것이 경건이며 거룩이라고 가르치는것이 과연 진리이며 진실입니까?
주님께서 그런꼴을 보자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까? 이미 지나간, 주님의 오직 주님만이 치루셔야하는 고난을 묵상하며 해마다 슬퍼하는것이 과연 주님이원하시는 경건한 삶일까요? 주님의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고 애통해 하고 아파하고 죄를 슬퍼하며 회개하는 것이 나쁘다는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억지로 공동체에게 강요한다는것이 과연 옳은것일까요?
사도들의 삶을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무리 뒤져봐도 주님의 탄생과 고난받으심에 대하여기념하자고 한 곳이없습니다. 다만 사도들이 말하는 십자가와 고난 받으심은 복음을 전할때 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와 그리스도라는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전할 때 십자가와 고난을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고난을 넘어서서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증인으로서의 삶이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주님이 고난 받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가운데서 멸망할 것입니다.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아나시고 부할하심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도바울은 분명하게 이렇게 전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살전5:16-24)
항상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하심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가운데서 우리의 모든 삶가운데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삶의 여정에는 슬픔도 있고 아픔도 있고 고난의 때도 있습니다. 이것을 바울사도는 환난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는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우리로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바울사도는 감옥에서도 기뻐하라고 가르칩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도 찬양하고 감사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감옥에서도 얼마나 꿀잠을 잤는지 천사가 옆구리를 발로 찰때까지 자다가 엉겁결에 비몽사몽간에 잠에 취해서 빠져나올 정도로 평안을 누렸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감옥에서 그렇게 깊이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조금 지나면 사순절이니 고난주간이니 하며 성도들에게 경건하라고 가르칠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금식도 하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 그동안 주님께 죄스러운것을 조금이나마 감할 수 있겠다는 심리적인 효과를 노리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나 행하는자들 역시 그것을 통하여서 얼마간 마음의 평안을 누릴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때문에 나는 그래도 할일 다했노라 착각하게 만드는 일종의 면죄부를 남발하는것은 아닐까요?
일종의 의식과 행위를 정해놓고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신앙생활 잘하는것이 되는 수료증같은 보이지 않는 심리적인 거짓된 평안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단순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단순했습니다. 지금처럼 복잡한 순서가 없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부활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부활하신 주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논리가 필요하며 순서가 필요합니까? 다시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의 입장에서 뭐가 제일 중요할까요? 그 소식을 사도들로부터 들은 성도들에게 무엇이 제일 중요할까요?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속에서 주님의 부활을 생생하게 전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여러분들이 예를 들어서 월드컵 결승전을 보고 왔다고 합시다. 그 현장에서 한국의 선수들이 골을 넣고 우승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만나는 사람에게 뭐라고 전하겠습니까? 운동장의 규모는 얼마며 관람료는 얼마며 관중이 얼마나 많았으며 선수는 누구 누구이며 심판이 어느나라소속이라는 것을 말하겠습니까? 결승골을 넣은 선수의 이름을 먼저 크게 말할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인 사도들이 주님의 고난에 대하여 말하겠습니까? 소소한 일상사들을 가르치겠습니까? 그들의 마음은 자기가 본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감격을 똑같이 전해주려고 최선을 다할 것이 아닐까요? 오늘날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불필요한 절기에 같혀있습니다. 거기다가 분명하게 오류가 있으며 잘못된것을 단지 오랜 전통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요하며 가르칩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적대시하기 까지 합니다. 나와 다르면 이단이며 그 순간부터 적입니다. 내가 틀릴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동안 누구에게서 배웠는데 그럴리가 없다고 맹신합니다.
나는 어디 학파며 어디 출신이라고 강조합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가문 자랑하고 전통과 학문자랑했습니다. 조상들의 유전을 지키는데 누구보다도 압장섰던 인물이 바울입니다. 그런 바울이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날과 달과 절기들과 안식일에 대하여 상관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힌것 외에는 더 이상 알지 않겠다고 작정을 해버렸습니다. 그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십자가에는 고난과 수난에 대한 것보다는 그 십자가로 구원하신 은혜가 더 컸다는 것입니다.
2009년도 새아침입니다.
저는 아무런 배움도 없고 잘난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지난 한해동안 주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이제도 주님의 은혜와 긍휼하심만을 구할 뿐입니다. 제게 주시는 은혜를 전하는데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도록 담대함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아닌것은 아니다라고 말할수 있도록 용기를 주옵소서.
그러나 원망이나 다툼으로가 아니라 성령안에서 화평과 사랑으로 말할수 있는 지혜와 겸손을 허락해 주옵소서. 틀린것은 틀리다고 말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잘못된것은 회개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든 삶이 진실로 주님의 뜻에 의하여 살아지며 낮아지며 겸손해지며 긍휼한 마음으로 형제를 대하며 자매를 대할때 순전함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대하게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과 함께 우는자들과 함께 울며 웃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며 그렇게 달려갈 길을 마칠 수 있도록 주님 손잡아 주옵소서. 아멘.
2009/01/01. ⓒ주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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